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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국건국공신

문화대혁명의 불길이 타오르고

뎡샤오핑이 마오쩌둥의 불만과 린뱌오의 미움을 받은 이유는?

“마오쩌둥은 덩샤오핑에게 불만이 많았고, 린뱌오는 덩샤오핑을 미워했다. 덩샤오핑이 마오의 말을 잘 듣지 않았고, 가오강을 통해 손을 내민 린뱌오의 협력 요청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중국 공산당사가 기록한 한 구절이다.

 

마오와 린뱌오가 누군가? 바로 1960년 중국을 좌지우지하던 두 권력자다. 중국 전체를 불태운 문화대혁명의 두 선동가였다. 덩샤오핑은 이렇게 두 권력가의 미움을 받았다. 문화대혁명의 불길이 타오르고, 덩샤오핑이 두 번째 타깃이 된 이유다.

마오는 1950년 중국을 대약진 운동으로 몰락시켰다. 펑더화이를 비롯한 당내 많은 이들이 이 문제를 지적했고, 마오는 어쩔 수 없이 잠시 물러섰다. 전면에 나선 것이 류샤오치 등이다. 류샤오치 국가 주석, 저우언라이 총리, 덩샤오핑 중앙서기처 총서기(1956년 9월 전국대표대회)의 삼두체제가 형성된다. 덩샤오핑은 좌파 실용주의자였다.

 

필자 개인적으로 덩샤오핑에 관한 중국 공산당의 자료를 보면, 왕양명이 떠오른다. 중국에 심학, 양명학의 씨앗을 뿌린 인물이다. ‘마음이 곧으면 어떤 변화에도 유연히 대처할 수 있다’는 게 개인적으로 이해한 양명 심학의 본질이다. 덩샤오핑 역시 마찬가지다 싶다. 골수가 ‘공산주의’여서 그 골수를 튼튼하게 하는 것이라면 행동이 무엇이든, 어떤들 무슨 상관이 있는가?

덩샤오핑의 이 같은 사상은 대약진으로 피폐해진 중국을 재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됐다.

 

그러나 질식할 것 같았던 중국 대륙이 숨을 돌리자, 마오쩌둥은 이번엔 문화대혁명을 기획한다. 대약진의 참패를 대규모 정풍운동으로 극복하려 한 것이다. 문화대혁명 직후 덩샤오핑은 바로 실각을 한다. 실각의 원인 무엇보다 서두에 언급한 두 가지다. 마오의 불만과 린뱌오의 시기였다.

 

마오에게 있어 ‘삼면홍기’와 ‘문화대혁명’의 최대의 성과였다. 삼면홍기는 세 개의 붉은 기라는 뜻으로 1958년 마오가 주창한 사회주의 기본 노선이다. 총노선, 대약진, 인민공사를 뜻한다. 처음 마오의 이 같은 삼면홍기 전략에 찬성했던 덩샤오핑은 1962년 완전 반대로 돌아선다. 덩샤오핑이 지지한 노선은 덩쯔후이의 ‘삼자일보’(三自一包)였다. 삼자는 이익과 손실을 책임질 자유, 자유시장, 자영토지를 의미하고 일보는 ‘보산도호’(包产到户)의 개별경제를 의미한다.

 

1960년 8월 9일 베이다이허 회의가 끝나기 하루 전 마오쩌둥의 공격은 이미 시작됐다. 본래 회의 결과보고서는 토의를 끝내고 마오쩌둥의 사인만을 남겨놓고 있었다. 그러나 마오는 사인을 하는 하는 대신 덩샤오핑과 류샤오치의 실명을 거론하며 비판을 한다. 그 뒤 4주후 마오쩌둥은 모두가 반대한 인민공사 계획을 다시 내세운다. 그러면서 당초 도입하려던 가구당 자유경제 계획인 ‘보산도호’ 계획을 철회한다. 펑더화이 복권 계획도 철회된다. 당시 농촌관련 업무를 담당하던 덩쯔후이의 직책도 몰수한다. 이를 통해 마오는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에게 분명한 경고의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1966년 마오는 덩샤오핑에 대해 모두가 들으라는 듯 이렇게 말한다.

“덩샤오핑은 말귀가 어두워. 그런데도 항상 회의 때마다 내게서 멀리 떨어져 앉지. 1959년 이래 지난 6년간 그는 내게 한 번도 직보를 하지 않았지. 중앙서기처 일도 펑즌에게 다 맡겼다고 하더군. 그런 그가 내게 필요한 인물이라고?”

마오의 덩샤오핑에 대한 불만은 이렇게 깊어만 갔다.

 

린뱌오의 덩샤오핑에 대한 미움은 1953년 말의 한 사건이 원인이 된다. 당시 덩샤오핑은 가오강의 협력 요청을 거절한다. 1953년 마오쩌둥은 당 중앙지도부를 1선과 2선으로 구분한다. 가오강은 당시 린뱌오의 지지를 받고 당내 정치에 몰두하고 있었다. 덩샤오핑에게 “함께 류샤오치를 끌어내리고 당을 이끌어가자”고 제안한다. 덩샤오핑은 이 제안은 정중히 거절한다. “류샤오치 동지의 등장은 역사적이요. 전체적으로 큰 문제도 없소.” 덩샤오핑은 가오강 일파의 행위는 노선상의 옳고 그름의 문제라기 보다 권력만을 탐한 행위라고 생각했다고 당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1966년 8월 1일 마오의 ‘사령부를 폭파하라! 나의 대자보’가 발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