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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언라이 인물탐구] <14> 모든 적을 낙마시켜라!

1966월 12월 24일 중국 베이징 체육관 수많은 청년들이 모여 구호를 외치고 있다. 68세의 한 노인이 초초한 듯 시간을 본다. 군중의 목소리가 더 커진다. 

세계 절반이 크리스마스 이브 분위기에 젖어 있을 무렵이다. 중국 베이징 체육관에서는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문혁 사인방의 발호는 갈수록 심해졌다. 장칭江青 등 사인방은 당 중앙의 주요 간부들을 하나씩 겨냥했다. 하나씩 자신들의 위에서 자신들과 다른 목소리를 내는 이들을 제거해갔다. 
사인방의 총과 칼은 당중앙의 중난하이中南海 밖에 있는 수백만의 홍위병들이었다.  장칭 등 사인방은 외부 홍위병을 독려해 말썽을 일으키고, 그 것을 문제 삼아 당 중앙 간부 하나 하나를 낙마시켰다. 물론 이 모든 것의 뒤에는 마오쩌둥毛泽东이 있었다. 

 

저우언라이周恩来는 그의 공산혁명 투쟁 세월의 가장 혹독한 10년을 겪게 된다. 그는 어떻게든 장칭 등이 목표했던 당 간부들을 보호하려 했다. 사실 그게 자신을 위한 길이기도 했다. 모든 간부가 낙마를 하면 결국 저우언라이 자신도 낙마를 할 것이 뼌했다. 또 그렇다고 저우언라이는 자신이 낙마하면서 남을 보호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마오쩌둥 역시 함부로 건들지 못하는 인물이 바로 저우언라이였다.


장칭 등은 어떻게 해서라도 그런 저우언라이의 트집을 잡으려 노력했다. 이렇게 장칭 등 소위 문혁 사인방과 저우언라이의 끌고 당기는 줄다리가 이후 10년을 간다. 결국 1976년 저우언라이가 병들어 죽기 직전까지 이어진다. 

 

중국 공산당사는 이 10년의 문혁 기간은 저우언라이가 겪었던 그 어떤 투쟁의 고난보다 힘들었을 것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문혁이 궤도에 오르면서 장칭 등 중앙문혁소조는 이런 저우언라이를 대놓고 무시하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게 만나기로 한 약속 시간을 지키지 않는 것이다. 저우언라이는 당시 서열 2위의 국가 총리임에도 말도 안되는 하급 중앙문혁소조 위원들이 저우언라이를 1시간 이상 기다리도록 했던 것이다. 


사실 그 당시 중국은 문혁도 문혁이지만, 오랜 가뭄과 지진의 고통이 아직 남아 있었다. 국가 살림을 맡은 총리로서 저우언라이가 베이징에 붙잡혀 있다는 것만으로도 중국에게는 국가적 손실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귀한 저우언라이의 시간을 중앙문혁소조는 엉뚱한 곳에 낭비를 시킨 것이다.

 


저우언라이가 그렇게 중앙문혁소조에게 끌려 다닌 것도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 당시 저우언라이의 정말 고심은 어떻게 하든 당 중앙 간부들을 지키는 데 있었다. 이 중국 땅에 공산당 혁명을 성공시킨 당 중앙의 간부들이 공산 혁명에는 제대로 참여도 하지 않았던 장칭 등 사인방의 손에 낙마하는 것을 지켜볼 수 없었던 것이다.


공산당 사료에 따르면 저우언라이는 어떻게든 당 중앙 간부의 홍위병에 의한 몰락을 막으려 노력했다. 대표적인 인물인 허룽贺龙1895~1975이다. 허룽은 저우언라이, 주더朱德 등과 함께 난창南昌봉기를 일으킨 인물이다. 

 

장칭이 영화판을 떠돌 때 모두 목숨을 내걸고 공산혁명에 참여했던 이들이다. 저우언라이는 허룽을 지키기 위해 허룽과 가족을 그의 관사에 한동안 머물도록 배려했을 정도다. 

 

1966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베이징北京 체육관에서는 허룽 비판대회가 열린다. 앞에서 묘사한 군중은 홍위병, 노인은 저우언라이였다. 대회는 저우언라이는 허룽을 위해 연 것이다. 그토록 아끼던 허룽을 직접 비판한다고 무슨 소리인가 싶다. 

 

저우언라이가 직접 비판대회를 주도한 이유는 그대로 둘 경우 홍위병에 의해 허룽이 정말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는 걱정에서 나온 고육지책이었다. 베이징 체육관에 허룽을 비판하는 군중의 외침이 갈수록 커졌지만, 당초 계획과 달리 허룽에 대한 비판대회는 쉽게 진행되지 않았다. 현장에 도착해야 했던 중앙문혁소조 사람들이 아직 오지 않았던 것이다.

 

중앙문혁소조의 장칭은 안그래도 미운털이 박힌 저우언라이가 더욱 미웠다. 군중이 조금이라도 더 허룽을 욕하도록 두자는 게 중앙문혁소조의 의도였다. 당사료에 따르면 허룽의 비판대회는 중앙문혁소조가 심술을 부리면서 7시에 열리기로 한 대회가 8시가 다 되어서야 겨우 열렸다.

 

중앙문혁소조 사람이 도착하고 저우언라이는 겨우 한숨을 내쉬며 비판대회장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제 또 하나의 위험이 겨우 지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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