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3.23 (토)

  • 구름많음동두천 1.3℃
  • 맑음강릉 6.8℃
  • 구름많음서울 3.9℃
  • 맑음대전 3.7℃
  • 맑음대구 5.9℃
  • 구름조금울산 5.9℃
  • 맑음광주 4.7℃
  • 구름많음부산 6.6℃
  • 맑음고창 4.1℃
  • 맑음제주 8.6℃
  • 구름많음강화 5.4℃
  • 맑음보은 3.1℃
  • 맑음금산 1.6℃
  • 맑음강진군 6.3℃
  • 맑음경주시 5.7℃
  • 구름조금거제 6.7℃
기상청 제공

[저우언라이 인물탐구] <1> 마오쩌둥 1인 천하 시대의 중난하이(中南海) 풍운 인물

 

중국의 비밀을 감춘 곳, 바로 중난하이다. 그 중난하이 풍운의 역사가 바로 신 중국의 역사다.

 

 중국의 모든 것이 결정되는 곳, 바로 중난하이中南海다.  남쪽 바다 한가운데라니? 구중심처보다 더 은밀한 맛이 있다. 중난하이는 사실 중해와 남해를 함께 부르는 명칭이다. 자금성 서쪽에 인공으로 만든 큰 호수 2곳이 바로 중해와 남해다. 과거 명청明清시대 때부터 황제의 쉼터, 귀족과 고관대작들의 거처가 있던 곳이다.  그만큼 경치도 아름답다. 

 

 

 

 청나라가 망한 뒤 중화민국 정부가 1925년 10월 10일 자금성을 고궁 박물관으로 시민들에게 공개키로 하면서 중난하이는 자금성을 대신해 중국 정치의 중심지가 된다.
그 순간, 중난하이의 평지풍파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각 지역 정치 세력은 물론이고, 외세 일본까지 참여한 소위 '중난하이 왕좌의 게임'이 벌어진 것이다.

 

 지방 군벌이 득세하면서 정치 중심의 지위가 흔들린다.  하지만 그도 잠시일 뿐. 공산당이 천하를 통일하면서 중난하이의 정치적 지위는 더욱 공고해진다. 베이징北京이 공산당 천하 중국의 수도가 됐고, 마오쩌둥毛泽东을 비롯한 중국 공산당 건국공신들은 중난하이에 살기 시작했다.
 
 역시 피할 수 없는 것이 '왕좌의 운명'이다. 중난하이 풍파도 다시 일기 시작했다.  1957년 대약진, 1958년 반우, 1960년 중소 관계 분열, 이어지는 3년간의 자연재해, 10년간의 문화대혁명.
중난하이 거주한 공산당 초기 공신들도 이 풍파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서로 죽고 죽이는 혈풍이 일었다.

 

 

 

덩샤오핑邓小平이 나서 중난하이는 그나마 안정을 되찾았다. 소위 '집단지도체제'는 이 같은 안정의 산물이었다.  그런데 덩샤오핑 개혁 개방 뒤 40여 년이 흐른 오늘, 중난하이가 다시 요동치고 있다. 시진핑习近平 주석의 천하가 되면서 중난하이 권력 지형이 다시 흔들리고 있다.  중난하이에 소위 1인 천하 시대가 다시 도래했다. 

 

그럼 다른 이들의 권력은 어떻게 됐을까?

 

 중난하이에 사는 소위 당 중앙, 지도자들은 알겠지만, 침묵만 지키고 있다.  아마 수십 년이 지나 다시 사태가 바뀌고 나면 우리도 알게 될 것이다. 지금에서야 우리가 마오쩌둥 1인 천하 시대의 중난하이 속 사정을 알 수 있듯 말이다.

그럼 과연 마오쩌둥 1인 천하 시대의 중난하이는 어떠했을까?
당시 풍운을 보면, 지금 중난하이 풍운의 향방을 알 수 있지 않을까?

 

国破山河在, 城春草木深。
guó pò shān hé zài, chéng chūn cǎo mù shēn 。

 

정권 바뀌어도 산하는 남으니
도시 초목 다시 봄을 맞으리


 두보의 시구처럼 본래 남은 것을 통해 지난 것을 알고, 지난 것을 통해 오는 것을 아는 법이다.

 

 

 마오쩌둥 1인 천하의 중난하이, 총칼 없는 전쟁이 벌어진 전쟁터였다.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을 거치며, 이 권력 암투로 인해 직간접적인 희생자 수는 실재 총과 칼로 국민당과 일본군과 싸웠을 때보다 더 많았다고 한다. 중국 당사에서 마오쩌둥 외에 중난하이 주요 간부로 50명의 지도자를 꼽는다. 우리의 새 이야기 '중난하이 풍운'은 바로 이 50명 간부들의 이야기다.
그 첫째가 바로 저우언라이周恩来 총리다.

 

 

저우언라이, 문화대혁명의 찬성 혹 반대? 
난세의 돌기둥 流中砥柱?


 지난 3월(2018년) 5일은 현대 신중국의 명재상, 저우언라이 총리의 탄생 120주년 기념일이었다.
시진핑 국가 주석은 앞서 1일 베이징 인민 대회당에서 좌담회를 열고, "저우 총리의 청렴을 배우자"고 강조했다.

 

 최근 마오쩌둥에 대한 홀대를 생각할 때 좌담회는 파격적인 규모였다.
원인은 탄생 120주년이라는 숫자의 의미도 컸지만, 그보다 저우언라이의 중국 내 독특한 지위 때문이다.

 

 저우언라이는 1898년 3월 장쑤江苏성 화이안淮安에서 태어났다.당대 중국에서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 태어났다. 일찌감치 일본 와세다 유학을 했고 유럽 유학도 했다.  초기 중국 공산당 멤버다. 경력만 보면, 왜 저우언라이가 마오쩌둥 밑에 있었는지 이해가 안 될 정도다.

 우리의 이야기는 1966년에서 시작을 한다. 

 

 

 당시 중국은 대약진 운동 실패 이후 북방 지역에 가뭄이 들어 고생을 할 때였다. 
안 그래도 어려운 경제상황인 데 말 그대로 설상가상의 상황이었다. 저우언라이는 당시 이미 확고부동한 총리였다. 베이징보다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면 농업과 산업 생산을 격려하고 있었다.
중난하이에는 가뭄보다 더 고통스러운 정치 바람이 조금씩 불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