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3.16 (토)

  • 흐림동두천 4.6℃
  • 맑음강릉 9.2℃
  • 연무서울 7.2℃
  • 구름많음대전 8.9℃
  • 맑음대구 9.1℃
  • 맑음울산 10.0℃
  • 맑음광주 9.7℃
  • 맑음부산 12.1℃
  • 구름조금고창 9.2℃
  • 맑음제주 10.6℃
  • 구름많음강화 7.2℃
  • 흐림보은 8.2℃
  • 구름많음금산 9.2℃
  • 맑음강진군 10.4℃
  • 맑음경주시 10.6℃
  • 맑음거제 11.0℃
기상청 제공

난징 대학살, 81년 전 벌어진 최악의 학살사건

 

중국 난징대학살 81주년인 13일 중국 전역에서 추모행사가 이어졌다.

 

난징대학살은 19371213일부터 이듬해 1월까지 국민당 정부 수도였던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이 저지른 대규모 중국인 학살사건이다. 중국 정부 당국과 학계는 일본군이 30만명 이상을 살해한 것으로 보는 반면 일본 학계는 대체로 피해자 규모를 22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중국은 지난 2014년부터 1213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해 희생자를 애도해 왔다. 201510월에는 중국이 신청한 난징대학살 관련 자료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기도 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난징에 관한 나의 마지막 기억은 죽어간 중국인, 죽어간 중국인, 오직 죽어간 중국인이었다.”(AP통신 기자 예이츠 맥대니얼의 증언)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과거를 되풀이한다"(난징대학살을 고발하는 책자 난징의 강간에 적힌 글귀)

 

 

홀로코스트에 필적하는, 어쩌면 그를 능가할 야만스런 대학살

1937, 중일전쟁 시기 일본군이 난징점령 입성을 다룬 일본 아사히 신문 뉴스. 대부분의 전시 선전영화는 부대의 위민활동이나 대민지원 장면을 삽입해서 해당 지역을 해방시킨 해방군으로 스스로를 포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영상에는 민간인이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킬 때는 베이징과 상하이에서 시작해 빠른 시일 안에 주요 대도시를 점령하고 중국 국민당의 항복을 받아낸다는 속전속결이 기본방침이었다. 그러나 상하이 전투가 중국군의 거센 저항으로 예상보다 길어지고 결국 오송 전투에서 중국군 피해의 절반이나 되는 큰 피해를 입고서야 승리를 거두게 되자, 눈이 뒤집힐 대로 뒤집힌 일본군은 참모본부의 불확대 방침도 씹고 당시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으로 진군했다.

 

1937109일 상하이가 함락된 후 국민당 수뇌 멤버들은 난징을 전략,전력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고 이동하기로 결정한다. 이 때 유일하게 탕성즈 한 사람만이 "난징을 필사적으로 지켜 생사를 함께하겠다."고 방어전을 주장해 난징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남는다. 1115일 장제스는 수도를 충칭으로 옮겨 철퇴하고, 1210일 난징에 남아있는 중국군은 일본군의 최후통첩을 무시, 이에 일본군은 난징 점령작전을 개시했다. 일본군의 맹공에 피해가 크게 누적되자 1212일 탕성즈는 3일 간의 휴전을 통한 명예로운 항복을 하는 대가로 중국군을 철수시키는 방안에 대해 장제스에게 제안했지만 장제스는 묵살했다.

 

1212일까지 중국군은 수적, 질적으로 모두 열세인 상황에서 탕성즈가 처음부터 난징 외곽에서 일본군의 진격을 방어할 수 있는 여러 요충지역들을 스스로 포기하는 등 방어 전략을 잘못 수립했는데다가 화력과 병력의 질적 측면에서 압도적으로 불리했기 때문에 장기적인 사수는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결국 1212일 일본군은 독가스를 뿌려 중국군 방어선을 무력화시켰고 일본군 전차대와 포병대의 공격에 성벽이 무너지면서 방어선이 와해되기 시작했다. 탕성즈는 그날 오후 5시에 회의를 소집, 전군에 퇴각명령을 내린 다음에 참모들과 함께 8시에 우한으로 달아났다. 사령관이 사라진 난징의 중국군은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히거나, 난징에 남아 계속 싸우거나, 난징을 어떻게든 벗어나는 등 완전히 와해된다.

 

양쯔강에는 수십만 난징 시민들과 중국군이 살기 위해 아수라장을 이루었고 일본군이 집중 공격함으로 무수한 인명을 살상했다. 1213일 오전 4시에 난징의 정부 청사가 함락되면서 난징은 일본군의 수중에 완전히 떨어졌다.

 

이 순간 탈출하지 못한 25만명에 달하는 시민들과 10만 이상의 패잔병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그 어떤 단어로도 난징의 참상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었다.

손쉽게 난징을 손에 넣은 일본군은 백기를 들고 항복한 국민당군은 물론, 패잔병을 처리한다는 명목으로 '모자를 오래 쓴 흔적이 있거나 손에 굳은 살이 박힌 젊은 남자' 모두를 닥치는 대로 끌어모아 기관총으로 양쯔강에 쓸어넣었다. 이들 중 과연 몇이나 패잔병이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애시당초 농업으로 먹고살던 그 시대의 중국에서 모자를 오래 쓰지않았거나 굳은 살이 안 박힌 남자가 얼마나 많기나 할까 싶다. 패잔병이 맞다고 쳐도 전투불능이 된 군인들을 만 명 단위로 학살하는 것은 그 자체로 크나큰 전쟁범죄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야만적이나, 나중에는 총알이 아까워서 칼로 난도질하거나 생매장까지 했다고 한다. 전후에 학살에 참가한 한 군인의 일기가 발굴되었는데, "심심하던 중 중국인을 죽이는 것으로 무료함을 달랜다."면서 "산 채로 묻어 버리거나 장작불로 태워 죽이고 몽둥이로 때려 죽이기도 했다."라는 문구가 등장한다. 그리고 순순히 항복한 군인이나 일본군을 환영하는 민간인까지 보이는 족족 칼로 베거나 때려죽이는 등 참혹하게 살해하면서 달아나면 그건 또 그거대로 수상하다고 죽이고 그러면서도 왜 중국인들이 일본인을 두려워하면서 달아나는지 알수 없다는 말 따위나 쓰고 있다.

 

난징 대학살에 단일 규모로 가장 큰 학살은 무푸 산 근처에서 일어났다. 난징의 북쪽, 곧 난징과 양쯔 강의 남쪽 둑 사이에 있는 이 산에서는 57,000명의 민간인과 중국의 전직 군인들이 살해되었다. 수많은 중국군의 시체를 처리하는 것은 일본군에게 또 다른 문제였다. 난징과 그 주변에서 학살당한 전체 중국군 가운데 일부만이 무푸 산에서 처형되었는데, 이 일부 시체 처리에만 며칠이 걸렸다. 시체를 매장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7천에서 8천구의 시체를 묻을 수 있는 커다란 구덩이를 팔 수 있는 곳을 찾기가 매우 힘들었다, 시체를 소각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일본군에게는 그럴만한 충분한 양의 연료가 없었다. 예를 들어 무푸산 학살 후, 일본군은 시체에 휘발유를 드럼통으로 부어 시체를 태우려고 했지만 불길이 시체를 재로 만들기 전에 연료가 바닥나는 일까지 있을 정도였다. 결국 대부분의 시체는 양쯔 강에 내던져졌다. 애초에 학살을 안 했으면 이런 걸로 고생하지도, 연료를 낭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중국인 포로나 민간인들이 일본군의 총검술 연습이나 목베기 시합에 사용된 것. 여기서 일본 장교였던 무카이 도시아키(向井敏明)와 노다 쓰요시(野田毅)100명의 목을 누가 더 빨리 베나 재는 시합, 다시말해 100인 참수 경쟁을 한 사실이 있었다. 더 기가 막힌 건, 당시 일본 언론에서는 무슨 스포츠 시합 중계하듯 이 베기 시합을 대서특필했다는 것. 다만 100인 참수 경쟁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 기사를 쓴 기자는 참수된 100인이 당연히 적군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사를 쓴 것이었다. 이후 전범재판에서 증인으로 참석한 기자는 이들이 민간인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전해듣고는 매우 허탈해했다. 심지어 이를 통해 진검으로 베는 기술을 연마한 잡것들도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적 전투원과 싸우다 목을 벤 것이 아니면 100% 전쟁 범죄니 두 장교 모두 당연히 전후에 전범으로 기소되어 사형당했는데, 사형이 확정되기 직전까지 무죄를 주장했다고 한다. 웃기게도 당시 기사를 펼치며 자랑하던 이들이었지만 이 기사가 증거가 되어 자신들을 사형시키게 되자 왜곡이라고 발버둥쳤다고 한다.

 

이외 300인 베기에 도전한 다나카 군키치(田中軍吉)라는 범죄자도 있었다. 역시 전후 붙잡혔고 전범으로 기소되어 사형에 처해졌는데 당연한 이야기지만 신문에 실릴 때는 아주 자랑스럽게 큰소리 치던 이 인간도 자기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고 끝까지 무죄를 주장하며 왜곡이라고 발버둥치다가 결국 무카이, 노다와 같은 날 총살당했다.

 

여자도 무사하지 못했다. 아니, 더 심한 꼴을 당했다. 전후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간 일본군 위안부들도 상당수가 저런 식의 참혹한 죽음을 맞았다. 반항의 기미가 보인다거나, 탈출을 시도한다거나, 성병에 걸리는 일이 생기면 죽음을 당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특별히 이유가 없이도 학살당했다고 한다.

 

전후재판에 따르면 약 2,000명의 여성이 강간당했다. 현재는 80,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숫자만 충격적인 것이 아니라, 산채로 배를 갈라 창자를 꺼내고 유방을 도려내거나 팔다리를 벽에 못으로 박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말 그대로 살아있는 지옥이자 어지간한 쇼크 사이트에서도 보지 못할 풍경. 이것도 모자라 상기했다시피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가 딸을, 아들이 어머니를 강간하게 했다고도 한다.

 

관련 증언에 따르면, 아무 집이나 찾아가 어머니를 강간한 다음 울부짖는 딸과 함께 우물 속에 던져버리고 그 안에 수류탄을 던진다음 우물문을 막았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의 악행이 비일비재했다.

 

심지어 여자뿐만 아니라 어린 소년들도 닥치는대로 강간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펄 벅이 중국에서의 실제 경험을 토대로 쓴 소설에도 일본군들이 민가에 들이닥쳐 소년을 집단강간하는 묘사가 등장한다.

 

당시 난징에 있던 서양인들의 기록과 제보에도 처참할정도로 강간에 대한 내용이 많이 나온다.

 

난징 대학살 동안 일어난 강간은 1971년 벵골 지역에서 파키스탄 병사들이 저지른 조직적인 강간과 2차대전 말기 소련군의 독일여성 집단강간을 제외하곤 역사상 유례없는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최악의 강간이다. 보스니아 내전 당시 강간에 대한 보스니아의 통계 자료가 정확하지 않아서 비교하기가 힘들지만 보스니아 전쟁 당시의 집단 강간보다 난징 대학살에서 저질러진 강간은 그 정도가 훨씬 더 심각하다고 추정한다. 임신 중인 여성 역시 예외가 될 수 없었고, 임신 중이거나 막 출산한 여성도 강간의 희생자가 되었다. 임신 9개월의 한 여성은 강간을 당한 후 건강은 물론 정신마저도 이상해졌으며, 임신을 한 여성을 발로 걷어차 죽이는 일도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