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 프랑스 조기 유학 떠난 덩샤오핑, 23세 작은 이름 그러나 큰 사람으로 돌아오다.

2019.08.18 11:15:30

덩샤오핑은 스스로를 ‘인민의 아들’이라 한다.

참 덩샤오핑 다운 모습이다.

아버지가 아니라 아들이다. 동양에서 아들의 위치가 무엇인가?

희망이다. 집안의 기둥이다.

동양의 모든 집안이 아들이 훌륭하게 자라 집안을 빚내기를 바란다.

아버지는 그 권위에 따르지만,

집안의 기둥이 된 아들은 믿고 따른다.

 

이름도 좋다. 작은 평민이다.

실제 작은 키의 덩샤오핑에 이 이름만큼 어울리는 것도 없다.

그런데 샤오핑은 본명이 아니다.

덩샤오핑은 1904년 8월 22일 쓰촨 광안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덩셴성(鄧先聖)이다. 이름에 성스러울 성이 들어가 있다.

작은 덩치에 어울리는 게 아니다. 학교에 다니면서 불렸던 이름 역시 범상치 않다.

시셴(希賢)이다. 드문 현명함이다.

샤오핑이 이 범상치 않은 이름처럼 됐다.

그 범상치 않음을 감추는 진정한 현명함을 갖추고 나서야 비로소 그렇게 됐다.

도광양회는 이렇게 그의 삶 전반에 흐르는 가치다.

 

그가 자란 과정은 잘 알려져 있다.

현 중국을 조금이라도 아는 이는 덩샤오핑이 일찌감치 프랑스 유학을 떠났다는 사실을 잘 안다.

덩샤오핑은 1909년 중국 당시 지역 서당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한다.

불과 5살의 나이다. 부모의 교육에 대한 열정을 알 수 있다.

6살이 돼 협흥향초급소학교에 들어간다.

1915년 11살의 나이에 광안현고등소학교를 다닌다.

소위 지역이 나은 인텔리 겐지다.

 

1919년 베이징에서 5^4운동이 벌어지는 해

덩샤오핑은 충칭에서 프랑스 유학을 위한 준비과정에 시험을 쳐 합격한다.

1920년 16살의 나이로 프랑스 유학을 한다.

그 해 10월 프랑스에 도착한 덩샤오핑은 곧 프랑스 중학교에 입학 수업을 듣는다.

 

1921년 7월은 중국 공산당이 창당하는 중요한 해다. 1922년 유럽에도 공산당 지부가 만들어진다. 그 해 여름 덩샤오핑은 바로 공산당 지부에 가입한다. 훗날 이 지부는 공산주의청년단 유럽지부가 된다.

 

중국 사료는 1923년 덩샤오핑이 직업 혁명가의 생애를 시작했다고 평하고 있다.

덩샤오핑은 1924년 공산당 유럽지부가 펴낸 기관지 ‘적광’(赤光)의 편집인으로 활동을 한다. 덩샤오핑은 그 해 7월 공산당 유럽지부 서기국 위원으로 선정된다. 동시에 정식 중국 공산당 당원이 된다. 그의 나이 20살이 되던 해다.

 

덩샤오핑이 고국인 중국에 돌아오는 것은 1927년 봄의 일이다. 그에 앞서 그는 1926년 잠시 소련에 가게 된다. 모스크바 동방대학에 등록 불과 12일을 다닌 뒤, 바로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전학을 한다.

 

이때 덩샤오핑은 당대 중국의 주요 인물들과 사귀게 된다.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도 이때 덩샤오핑의 동창이다.

 

1927년 덩샤오핑은 중국에 귀국을 한다. 당시 국공합작의 시기였다. 덩샤오핑은 펑위샹의 연합군 소속 시안중산군사학교 정치처 처장으로 공산당의 지시를 받고 일하게 된다. 국공합작이 파기되고 8월 7일 중국 공산당은 우한에서 긴급회의를 한다.

 

이때 이름을 샤오핑으로 바꾼다. 공산당은 덩샤오핑을 상하이로 긴급 파견한다.

 

성스럽고 현명하다는 이름으로 떠난 소년이 중국에 돌아와 이름을 작은 평민, 작은 평등, 작은 평화로 바꾼 것이다. 작고 소박하지만 현실적인 이름이다.

 

이름은 작아졌지만, 덩샤오핑의 됨됨이는 더욱 거대해졌다.

 



박청로 parkchungro@haidongzhoum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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